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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정 양립, 핵심은 정시퇴근 문화입니다"

[인터뷰]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여성 대통령 시대, 어느 때보다 부처 협업 잘 된다"
"여성정책 패러다임 변화, 20년전과 격세지감…취약계층여성 자활터 공공기관내 있어야"
"섭섭해 하는 직원들 보면 인생 살만해…30년 공직생활 여성정책기록, 책으로 펴낼 생각"

(서울=뉴스1) 염지은 | 2014-08-01 10:15 송고 | 2014-08-01 17:07 최종수정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뉴스1
"며칠 지나고 나니 아쉬운 게 없네요. 하고 싶은 걸 다 했고 맡은 일에 정말 열정을 바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즐겁게,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 나흘째 되던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여성가족부 맏언니 이복실 전 차관(53)은 여전히 밝게 웃는 모습이었다.

29년 5개월의 공직 생활, 20년 동안 일해 온 여성가족부와의 작별에 아쉬움이 왜 없을까마는 "아쉬운 게 없다"며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끊임없이 날아오는 격려와 안부 문자에 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전화해 주시고 문자를 보내시네요. 외국에 나가 있는 과장들도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물어 옵니다. 직원들이 아쉬워하고 섭섭해 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이래서 인생은 살만 하다고 하는가 보다고 느꼈습니다. 너무 고맙죠."

행정고시 28회, 총무처 수습에 이어 문교부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4년 7월 여성정책을 담당하던 정무2장관실로 왔다. 지난 7월로 여성정책 업무에 꼭 20년을 몸담았다.
대통령비서실 행정관과 여성가족부 기획관리심의관, 보육정책국장, 권익증진국장, 대변인, 청소년가족정책실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15명의 여성장관을 모시며 한국 여성정책 발전사를 함께 해 온 산 증인이다.

행시 사상 4번째 여성 합격자였던 이 전 차관은 동기생 중 선두주자로 일찍 차관에 임용됐다. 직원들이 '일당백', '불도저'라고 부를 만큼 일에 열정적이었고 업무 추진력과 판단력이 뛰어났다.

사무관 연수 시절엔 미국 남가주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젠더(Gender)'와 교육을 접목한 넬리 스트롬퀴스트 지도교수를 만났다. 두 아이 엄마로 일·가정 양립이 버거웠던 그에게 지도교수는 사회적 의미로서의 '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었고 귀국 후 여성 관련 업무에 지원하게 됐다.

공직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 달라는 주문에 이 전 차관은 끊임없이 기억을 꺼냈다.

차별개선국장 시절에는 법무부, 민간단체와 협업해 호주제 폐지를 마무리 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가 해 오던 보육정책을 이관받아 보육정책국장으로 재직할 때는 보육시설의 질 제고를 위해 평가인증제도, 보육교사 자격증제 도입을 추진했다.

대학 및 군 관사 활용, 공공 아파트 내 어린이 집 설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공립보육시설을 확대하려 했으나 업무가 복지부로 이관돼 마무리 못한 점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차관 재직 당시 장애인과 청소년 대상 성매매 범죄자는 존스쿨에 보내지 않고 무조건 기소하도록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성매매 알선 여행사에 행정처분을 하도록 한 관광진흥법도 개정도 그의 역할이 컸다.

한부모 양육비 이행 확보에 관한 법률은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하기 전 부처간 합의가 안 돼 거의 무산될 뻔 했었는 데 마지막으로 관련 부처들을 일일이 돌며 건강가정진흥원을 특수법인으로 만들도록 담판을 지은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사상 첫 여성대통령 시대를 연 박근혜정부의 제1기 여성가족부 차관으로 조윤선 장관과 호흡을 맞추면서 여성인력 활용과 일·가정 양립 업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실태를 알리는 데 동분서주했다.

그는 조 전 장관(현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해 "경험의 폭이 넓고 본인이 겪은 분야들의 콘텐츠를 여성 정책과 연결하는 시도가 신선했다"고 평했다.

"한번은 기업을 경영하는 회사에서 여성정책 컨설팅을 받았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비교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좌표로 그려 줘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또 조 장관이 오면서 민간협력을 강조해 기업들의 사회공헌 사업을 여가부의 취약계층과 연결시켰는데 조 장관의 편지와 제안을 많이 들고 다녔습니다."

특히 지난해 앙굴렘 만화축제에 일본군 위안부 만화를 출품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만화 내용 일부가 외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어 한 장씩 다 보며 정리를 해 작가들로부터 원성을 많이 샀습니다. 차관회의까지 만화책을 들고 다녔는데 다른 차관들이 왜 만화책을 들고 다니냐며 웃기도 했습니다."

2001년 여성가족부 출범 이래 첫 여성차관이었던 그는 여성 장관과 남성 차관 구도를 깬 만큼 부담도 컸다. 하지만 여성 대통령시대 제1기 여성가족부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들을 이뤄냈다고 자부한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국정과제 평가에서도 2위를 했다. 여성 대통령이 나오면서 여성정책에 관한 부처간 협업이 잘 이뤄지며 신바람나게 일한 결과였다.

"여성 대통령이 여성정책에 관심이 많으시니 여성가족부로서는 어느 때보다 부처 협업이 잘됐습니다. 차관 임명장을 주시면서 '부처 간 협업이 가장 중요하다. 차관들끼리 친하게 지내라'고 하셨고, '협업을 잘하면 여성정책도 절로 잘 될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게 기억납니다."

이 전 차관은 차관회의에 갈 때 마다 각 부처 협조사항을 들고 갔다.

안행부 차관에게는 특별교부세에서 청소년수련시설 안전을 위한 개보수비 예산, 국토부 차관에게는 한부모에 대한 임대주택 물량 배정, 금융위 부위원장에게는 상장기업 경영공시시 임원들 성별 분리, 고용노동부 차관에게는 국제여성인턴 예산, 교육부 차관에게는 또래상담 예산 협조를 요청했고 긍정적 피드백이 많이 돌아왔다. 다른 차관들이 "차관회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복실 차관이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안전행정부 차관에게 취약계층 여성들의 자활을 위해 정부서울청사에 없는 미용실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아이디어와 김영선 청사관리소장의 도움으로 이달 중 정부서울청사에는 미용실이 처음으로 설치된다. 그냥 미용실이 아니라 취약계층 여성들이 자활을 꿈꾸는 삶의 터전이다.

"한부모, 다문화가정, 미혼모,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여성 등 취약계층 여성의 자활을 위한 자활터가 공공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좋은데 관련 규정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청사 미용실을 못 보고 나왔는데 초청해 주면 꼭 가보고 싶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정책에 대한 감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에는 손사래를 쳤다.

"실제 국무회의나 어록을 보면 그 어느 대통령보다 여성정책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를 살리려면 여성들의 경력단절을 없애야 한다는 말씀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국무회의나 수석보좌관회의에서도 기획재정부나 고용노동부 장관이 여성의 경력단절을  없애자는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한 적이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관련 부처들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정책이나 제도로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여성가족정책은 그가 처음 여성가족부와 인연을 맺었던 20년 전과 비교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달라졌다.

"여성발전기본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바뀌었는데 여성정책의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의 대표성 제고가 아직도 저조하다고 하지만 20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진입하고 있고 진입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성들이 중간 관리층에 많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일과 가정을 양립해 여성들이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해야하고 역량개발과 네트워킹을 통해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여성가족부가 언제까지 존립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이 전 차관은 "여성가족부가 여성업무만 하는 게 아니라 가족업무도 있다"며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우리나라에서 아직은 여가부가 해결하고 개선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강조했다.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많이 하면서 일·가정 양립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됐고 가족정책이 잘 추진되어야 여성정책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가족, 여성 정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일·가정 양립, 한부모 지원정책 등은 어느 부처가 하더라도 조직의 형태가 다를 뿐 국가가 해야하는 업무입니다."

너무 일만 하라고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직도 풀어야 할 큰 숙제다.

"일·가정 양립 핵심은 정시 퇴근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찍 퇴근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날이 밝을 때 퇴근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늦게까지 야근하는 습관과 분위기를 끊어줘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 가장 많이 일 하는 나라인데 정부가 하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기업이나 기관, CEO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이 전 차관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정현옥 전 고용노동부 차관이다. 둘은 같은 행시 28회 동기로 공직생활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언니 같은 분입니다. 연수 때 룸메이트로 더욱 친하게 지냈고 젊은 시절 많은 꿈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가 갈린 뒤에는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날 수 없어도 의지가 되는 분이었습니다." 임환수 국세청장 내정자, 방문규 기재부 2차관, 홍윤식 국무조정실 1차장 등도 든든한 동기들이다.

이 전 차관은 다음주 큰 딸이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30년 만의 긴 휴가를 떠날 계획이다. 

"뉴욕주의 이타카에 가서 한 달 정도 있다 올 예정입니다. 큰 딸이 코넬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반 년 만에 봅니다. 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마로서 많이 챙겨주지 못해 상처가 됐습니다."

긴 휴가를 보내고 나면 서점이나 대학 강의실, 미혼모 시설에서 이 전 차관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뭘 해야 할지 좀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하겠지만 많은 분들이 공직에서 쌓은 여성·가족·청소년 정책들의 경험을 알리는 게 좋지 않냐고 얘기하십니다. 책으로 기록을 남기라는 권유도 많이 합니다. 주변 분들과 상의해 가면서 여성정책 관련 책을 써볼 생각입니다. 미혼모 시설 등 취약계층 사각 지대에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남편(최근희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 학장)은 그에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것을 해라.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며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공직은 힘들지만 보람있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내가 만든 정책으로 국민들에게 혜택이 가는 것을 보면서 굉장한 보람을 느낍니다.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사회를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공직에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senaj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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