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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격변의 시대가 만든 일그러진 家長 '투명인간'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서울=뉴스1) 양은하 기자 | 2014-08-01 06:00 송고 | 2014-10-24 18:59 최종수정
(창비 제공).© News1
아버지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두메산골 '개운리'에서 3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난 만수는 내 아버지가 여러 번 들려줬던 그의 어릴 적 모습을 하고 있다.
공부 잘하는 장남 백수가 연필을 쥐면서 둘째 아들인 만수는 자연스레 집안의 굵직한 일을 도맡는다. 볼품없는 외모에, 공부에 소질 없는 만수는 느리지만 불만 없이 시키는 일을 우직하게 해낸다. 말이 아들이지 머슴과 다를 게 없다.

형이 죽으면서 만수는 장남이 됐고, 서울로 이사 가면서 가장이 됐다. 새벽에는 가스 먹은 누나들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렸고 밤에는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여동생을 찾아 최루탄 연기 속을 헤맸다.

남동생의 사생아인 태석을 도맡아 키우는 만수는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고도 자기 자식을 낳지 않는다. 다니던 공장이 망하면서 공장 점거에 나섰다가 억대 손해배상소송을 당한다. 새벽 4시 반부터 신문·세탁물·장바구니 배달, 목욕탕·찜질방 청소, 폐지 줍기, 세차로 7년 만에 신용불량자 딱지를 뗀다.

그는 마치 해야 할 일이 이미 입력돼 다른 곳에는 한눈팔지 '못'하는 로봇처럼 주어진 일을 한다. 오로지 가족들이 배 굶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에겐 독재나 민주화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먼 이국땅 이야기이다.
"예, 예, 그렇게도 정리가 되네요. 확실히 이해는 못하겠지만요. 저는 서울서 학교 다니는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골 사는 부모님 누나 할머니한테 돈 보내느라고 그런 일에 대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냥 나라가 발전하니까 좋은 일이다 싶었지요."

늘 채웠지만 구멍 난 독처럼 만수 집안은 가득 차지 않았다. 여전히 가족들은 흩어졌고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린다. 아등바등할 때마다 뭔가 달라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할 뿐 달라진 게 없다. 누구도 만수를 탓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를 알아봐 주지도 않는다.

'투명인간' 만수는 내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2000년대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오늘날 내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이후 2000년 사이 격변의 시대에 한국은 만수 같은 투명인간으로 가득했다.

베트남에서 고엽제로 병사한 장남, 가스를 마셔 바보가 된 누나, 강간당해 시집간 막내 여동생, 자폐증 때문에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죽은 태석, 하루아침에 해고돼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부잣집 고명딸이지만 친구가 없는 교회 누나 등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들은 압축성장과 이를 빌미로 요구된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다. 장남이라 가족을 먹여 살리고 엄마라 자식을 돌보듯 더러운 환경에서 장시간 일하고 말도 안되는 횡포를 참았다. 외로웠지만 그렇노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 그런 희생을 해야 하는지도 묻지 못했다. 그러기엔 배가 고팠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었다.

서로의 노고를 알아주지 못하는 가족과 이웃은 모두 투명인간이다. 먹고 살만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쌓인 일과 공부, 취업에 바빠 남편은 아내에게, 아이는 엄마에게, 형은 동생에게 투명인간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부여잡지 못한 투명인간들은 오늘날 '생명의 다리' 마포대교 위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밥은 먹었어? 잘 지내지? 별일 없지? 무슨 고민 있어?"라는 메시지가 있다. 지능형 감시 카메라의 보행자 감지 센서가 투명인간들의 움직임을 쫓는다.

하지만 정작 투명인간들을 포착하는 것은 감시 카메라가 아닌 또 다른 투명인간이다. 이것이 성석제가 던지는 지푸라기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서로 알아주는 길밖에 없다. 

마포대교 위에서 만난 투명인간 만수는 말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식구들 건강하고 하루하루 나 무사히 일 끝나고 하면 그게 고맙고 행복한 거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가만히 참고 좀 기다려보면 훨씬 나아져요. 세상은 늘 변하거든. 인생의 답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말이죠. 난, 난......"


letit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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