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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 2월의 독립운동가 한상렬

(서울=뉴스1) 김정욱 기자 | 2013-01-08 05:2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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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한상렬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한상렬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후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민긍호 등과 연합의진을 형성해 의병전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침탈을 본격화했고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광무황제에게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후 정미7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07년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본격화되자 제1연대 1대대 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로 항거를 표시했다.

이는 시위대 대원들에 이어 지방 진위대의 봉기로 확산됐고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돼 후기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했고 그 중심에 민긍호 의병장이 있었다.

한상렬은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서 지역민을 중심으로 의진을 형성했다.

한상렬은 민긍호와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했다.

일본군의 의병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한상렬은 횡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 홍천, 원주 등 산간지역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 특별편성부대의 배치와 의병에 대한 정찰이 강화되자 민긍호와 함께 충주성 공격을 감행해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일본군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민긍호마저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자 의병활동은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한상렬은 만주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이범윤, 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1915년 창의소(彰義所)를 조직하고 중대장이 된 그는 경흥지역 일본군 습격 등을 계획했다.

이후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에 들어가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 독립군 소모활동에 투입되기도 했다.

또 무장단체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해 대한군정부에서는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을 역임하는 등 만주, 연해주 등 일대에서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들이 다시 조직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좌진 장군을 보좌하기도 했다.

한상렬은 김좌진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 조직인 동우회에서 선전계, 군자금모금계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병장으로 강원도 횡성, 홍천 등 일대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주지역에서는 주로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 군자금 모집 등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또 상황에 따라 재편되는 독립군 조직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군 활동은 1926년 9월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세력의 흉탄에 순국하면서 막을 내리게 됐다.

정부에서는 한상렬의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k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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