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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영화읽기]다이버전트-시스템과 인간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 2014-04-25 23:59 송고


'체제'나 '시스템'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개개인에게는 무언의 강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체제나 시스템을 맞닥뜨린 인간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눠진다. 바로 '복종'과 '거부'. 물어보나마나 세상에는 이미 만들어진 체제나 시스템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부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아니, 그보다 체제나 시스템을 거부하는 자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닐 버거' 감독의 신작 <다이버전트>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타포를 많이 쏟아내고 있다.


가까운 미래의 시카고. 잦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인류는 하나의 사회, 다섯 개의 분파로 나뉘어 자신이 속한 분파의 행동규범을 절대적으로 따르며 철저히 통제된 세상에서 살게 된다.
다섯 개의 분파란 바로 에러다이트(지식)와 에머티(평화), 캔더(정직), 돈트리스(용기), 애브니게이션(이타심)으로 '핏줄보다 분파'가 중요한 사회에서 모든 구성원은 열여섯 살이 되면 테스트를 거쳐 해당 분파의 일원으로 평생 살아가게 된다.

테스트를 통해 분파가 결정되면 가족과도 이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주인공 트리스(쉐일린 우들리)는 테스트 결과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 '다이버전트'로 판정받게 되면서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다이버전트는 정부에서 개발한 감각 통제 시스템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한 강한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정부 입장에서는 제거 대상이다.

결국 트리스는 테스트 요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정체를 숨긴 체 군경(軍警) 역할을 담당하는 돈트리스를 선택, 그 일원이 되고자 노력한다.


'벗어난'이란 뜻의 '다이버전트(divergent)'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다이버전트>는 체제나 시스템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다섯 개의 분파가 존재하지만 사실상 '무분파'가 가진 의미가 더 크다.

하지만 그 전에 다섯 개의 분파도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지식과 평화, 정직, 용기, 이타심이라는 특성은 곧 인간의 성품이나 성향과 관련된 것이고, <다이버전트>에서 정부는 테스트를 통해 모든 인간을 일률적으로 구분, 그들의 삶을 결정지어 버린다.

물론 영화에서나 가능한 설정일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체제나 시스템을 벗어나 살 수 없는 현실에서 <다이버전트>의 다섯 개 분파가 던지는 메타포는 사뭇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이거다. 성품이든 뭐든 과연 인간을 일률적으로 구분해 그의 존재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까.

가령 <다이버전트>에서 지식을 추구하는 에러다이트는 그의 내면에 평화나 정직, 용기, 이타심 같은 것은 전혀 없을까.

또 공격성향이 강한 돈트리스는 지식이나 평화, 정직, 용기, 이타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혹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인간의 내면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단언컨대 인간은 복합물이다.


사실 한 사람을 두고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그가 선한지 악한지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그는 쉽게 선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더욱이 과거에 나빴던 사람이 현재는 착한 사람일 수 있고, 미래에는 다시 악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정된 실체는 이 우주에 아무 것도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그것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다이버전트>에서도 또 한 명의 다이버전트로 트리스와 사랑에 빠진 포(테오 제임스)는 그녀에게 다섯 분파를 모두 새긴 문신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난 하나에 그치고 싶지 않아. 용감하고 싶고, 이타적이고 싶고, 지적이고, 정직하고, 다정하고 싶어."


결국 <다이버전트>는 현실에서의 우리들 삶과 관련해 체제나 시스템에 부적응하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다.

체제나 시스템은 언제나 개개인을 조직의 부속품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것은 복합적인 인간의 속성과는 대치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간과 시스템은 상극이고,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질서유지라는 장점도 있지만 시스템은 언제나 다수를 통치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편리에 진정한 존재이유가 있다.

때문에 <다이버전트>는 오히려 체제나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니, 안락함에 빠져 자신의 본성을 잊고 살아가는 그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때론 질서보다는 혼돈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적어도 무미건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이버전트>가 던지는 철학적인 메시지의 근원도 사실은 그것과 맞닿아 있다.

비슷한 부류의 영화로 '크리스찬 베일' 주연의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작품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3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개개인의 감정을 모조리 통제하게 되고 기쁨이든, 슬픔이든 조금이라도 감정을 느끼는 자들은 특수요원들에 의해 처단된다.

주인공이자 특수요원인 존(크리스찬 베일)은 어느 날 감정을 표출한 한 여자를 심문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자는 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없이, 증오없이, 슬픔없이, 살아 숨 쉬는 것은 째깍거리는 시계에 지나지 않아요."

16일 개봉. 러닝타임 139분.


lucas0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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