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이상길의 영화읽기]300:제국의 부활-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 2014-03-15 00:59 송고


화려하고 독특한 비주얼로 2007년 시리즈 첫 편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300>은 서양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용 면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가 있다.
'스파르타'에 대한 지나친 미화가 그렇다. '페르시아'에 대한 지나친 비하도 마찬가지다.

물론 영화가 역사수업은 아니다. 그냥 가볍게 즐겨도 된다. 하지만 영화가 지닌 파급력을 생각하면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것 뒤에 숨겨진 실제 역사도 한번 쯤 찾아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곡해는 피해야 하지 않겠나.

실제로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잭 스나이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2007년 시리즈 첫 편에서도 지나치게 용맹하고 호전적인 스타르타에 대한 약간의 비꼼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비주얼과 파이팅 넘치는 300명의 병사들에 가려져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300>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525년 경 지금의 이란을 뜻하는 페르시아 대제국의 그리스 원정으로 인해 야기된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간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을 말한다. 300에서는 2차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는 도시국가 형태로 존재했는데, 그 대표적인 도시국가들이 바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아테네'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과두제(寡頭制)의 '스파르타' 등이다.

시리즈 1편이 스파르타 병사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면 이번 시리즈 2편 <제국의 부활>은 아테네 병사들이 주인공이다.

즉, 이번 2편은 1편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 왕이 이끄는 300용사들의 '테레모필레 협곡' 전투와 비슷한 시각에 바다에서 펼쳐지는 아테네 용사들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페르시아는 공공의 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300>시리즈는 서양 우월주의가 영화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역사가들은 흔히들 동·서양 최초의 문명 충돌인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지 못했다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이후 헬레니즘 문화나 로마문화도 융성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만 판단한 것일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했다고 하더라도 서양문명의 발달사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란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영화 <300>에서 야만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페르시아 제국이 사실은 '관용'과 '정의'라는 미덕을 중시하는 대단히 포용력 있는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2편에서 비로소 등장하지만 실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바빌론이나 이오니아 등 수많은 점령국들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특이한 정치제도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들은 모반을 꾀하거나 제국의 위엄에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페르시아의 절대 미덕인 '관용'과 '정의'를 자신들의 점령국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던 것이다.


반대로 스파르타에 대한 미화는 극을 달린다. 이번 시리즈 2편에서도 300용사들의 희생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치켜세우지만 스파르타야말로 사실은 대단히 야만적인 국가였다.

스파르타의 엘리트주의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1편에서도 등장하지만 그들은 병약하거나 심지어 못생긴 아이는 절벽에 버렸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일곱 살이 되면 야생의 짐승처럼 거칠고 독립적인 완성체로 길러지도록 집단 양육됐다.

여자는 사춘기 이후까지 뚜렷한 성징이 없어 아기 생산을 원만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질 경우 가차 없이 살해당했다.

스파르타 300명의 전사들의 희생이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켜낸 방패막이었다는 서양 역사가들의 찬송도 실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왜냐면 당시의 스파르타는 멸망 전까지 원시적인 왕정을 고수했으며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미련한 짓'이라고 조롱해온 대표적인 도시국가였기 때문이다.


결국 <300>시리즈를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전쟁으로 얼룩진 호전적인 서양 역사에 대한 미화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시리즈 1·2편 모두에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제라드 버틀러)이나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설리반 스탭플턴)가 왜 '협상'의 묘미를 살리지 못했을까하는 점이었다.

1편에서 레오니다스왕을 비롯해 모두 '슈퍼맨병'에 걸린 스파르타 300명의 전사들은 대화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질 급한 다혈질의 인간들이었고, 단순히 '흙'과 '물'을 달라는 페르시아 밀사를 우물에 쳐 넣어 오히려 전쟁을 앞당겼다. 자존심이 과연 생명보다 소중할까.

물론 그랬을 경우 영화가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겠지만 현실적으로 한번 쯤 생각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2편에서도 테미스토클레스는 굳이 쏘지 않아도 될 활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에게 날리면서 엄청난 피를 흘려야만 했다.

물론 2편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물리치지만 엄청난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고려시대 거란족 침입 당시 적장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여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족을 퇴군시켰던 외교관 '서희'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이나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를 비웃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그들에게 장예모 감독의 2003년작 <영웅>에 등장하는 동양의 깊은 철학 하나를 알려주고 싶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과 그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웅>에서 진시황(진도명)은 '천하(天下)'를 위해 암살을 포기한 무명(이연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진시황 가까이 접근한 무명은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동료인 파검(양조위)이 모래 위에 쓴 '천하'라는 두 글자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나라가 갈려 계속 싸우며 피를 흘리는 것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게 백성들을 위해서는 더 낫다는 뜻이었다.

"과인은 드디어 깨달았도다. 파검의 이 글은 검법의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劍)의 궁극적인 이상에 관한 것이다. 검의 첫 번째 경지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이다. 검이 내가 되고 내가 검이 된 후에는 풀잎조차도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검의 두 번째 경지는 검이 사람의 손을 떠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100보 밖에서도 맨손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검의 가장 궁극적인 경지는 손과 마음에서 검을 버리는 것이다. 검객과 세상이 하나 되는 순간 세상은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헌신인 것이다."

6일 개봉. 러닝타임 102분.


lucas0213@naver.com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